"전기차 시장이 침체됐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한 모델이 예외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현대자동차 캐스퍼 일렉트릭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3,215대가 팔리며 같은 이름을 단 내연기관 모델을 앞질렀다. 국내에서 전기차가 내연기관차보다 많이 팔린 사례는 극히 드물다.
같은 기간 현대차의 다른 모델들을 살펴보면 이 성과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 수 있다. 코나는 내연기관 모델이 8,800여대, 전기차가 1,200여대 팔렸다. 레이는 내연기관 14,600여대 대 전기차 2,500여대로 격차가 더 벌어진다. 프리미엄 브랜드인 제네시스 G80도 내연기관 14,600여대에 비해 전기차는 400대 수준에 그쳤다.
그런데 왜 캐스퍼 일렉트릭만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답은 실용성에 있다. 우선 차급의 변화가 눈에 띈다. 기존 내연기관 캐스퍼가 경차로 분류됐다면, 전기차 버전은 소형 SUV로 격상됐다. 차체 크기도 전장 3,825~3,845mm, 전폭 1,610mm, 전고 1,575~1,610mm로 내연기관 모델보다 전체적으로 커졌다. 특히 휠베이스가 2,580mm로 늘어나면서 실내 공간, 그중에서도 2열 공간이 눈에 띄게 넓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차급은 올라갔지만 전기차 특성상 기존 경차의 각종 혜택은 그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큰 차를 경차 수준의 비용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장비 구성도 기존 경차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전석 열선시트, 컬럼식 기어, 10.25인치 디지털 클러스터, OTA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등 중형차 이상에서나 볼 수 있던 사양들이 기본으로 들어간다. 현대차 전기차 라인업 최초로 페달 조작 방지 보조 기능까지 적용됐다. 2열 시트는 완전 폴딩이 가능해 차박용으로도 손색없다. 작은 체구지만 준중형 SUV 못지않은 공간 활용도를 자랑한다는 평가다.
성능 역시 도심 주행에는 충분하다. 최고출력 84.5kW, 최대토크 147Nm의 모터와 45kWh 리튬배터리 조합으로 1회 충전 시 최대 315km(WLTP 기준) 주행이 가능하다. 서울에서 대구나 전주까지는 충분히 편도 주행할 수 있는 거리다. 400V 고속충전을 지원해 10%에서 80%까지 약 34분이면 충전을 마칠 수 있다.
가격 경쟁력도 만만치 않다. 기본 모델인 프리미엄이 2,740만원, 최고 사양인 크로스가 3,190만원부터 시작한다. 각종 보조금을 적용하면 실구매가는 2,000만원 초반대까지 내려간다. 전기차 입문용은 물론 세컨드카를 고려하는 소비자들에게도 부담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인기가 너무 좋다 보니 출고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에 따르면 지금 계약해도 기본 12~14개월, 일부 트림은 최대 22개월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유는 생산 계획에 있다. 광주글로벌모터스의 올해 캐스퍼 일렉트릭 생산 계획은 총 47,700대다. 그런데 이 중 42,900대는 수출용이고 내수용은 고작 4,800대에 불과하다. 수출 비중이 작년 대비 4배나 늘어난 반면 내수는 절반으로 줄어든 셈이다.
여기에 예상보다 빠른 국내 수요 증가까지 겹치면서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현재 추세라면 당분간 이런 상황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캐스퍼 일렉트릭의 성공은 국내 전기차 시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창한 기술력이나 화려한 마케팅보다는 소비자가 실제 원하는 실용성과 가성비에 충실했을 때 시장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다만 1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출고 지연이 이런 인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